사이토 가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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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토 가즈미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활약했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으로,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1순위 지명으로 입단했다. 1997년 1군 데뷔 후, 어깨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2003년 20승을 기록하며 최우수 투수, 사와무라상 등을 수상하며 에이스로 성장했다. 2006년에는 투수 5관왕을 달성하기도 했다. 2007년 이후 부상으로 선수 생활의 어려움을 겪다 2010년 은퇴 후, 재활 코치, 야구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며 2022년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투수 코치로 복귀, 2024년부터는 4군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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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가즈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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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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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이토 가즈미 |
로마자 표기 | Saitō Kazumi |
출생일 | 1977년 11월 30일 |
출생지 | 교토부 교토시 미나미구 |
신장 | 192cm |
체중 | 92kg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선수 경력 | |
포지션 | 선발 투수 / 코치 / 감독 |
프로 입단 연도 | 1995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1위 |
소속 구단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96–2010) |
첫 출장 | 1997년 10월 5일 |
마지막 출장 | 2007년 10월 23일 |
코치/감독 경력 | |
소속 구단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1–2013, 2023–현재) |
등번호 | 88 (3군 감독) |
통계 (NPB) | |
승-패 기록 | 79-23 |
평균 자책점 | 3.33 |
탈삼진 | 846 |
수상 경력 | |
일본 트리플 크라운 | 2006년 |
에이지 사와무라상 | 2회 (2003년, 2006년) |
베스트 나인 | 2회 (2003년, 2006년) |
최우수 배터리상 | 2회 (2003년, 2006년) |
NPB 올스타전 | 2회 (2003년, 2006년) |
유튜브 (YouTube) | |
채널 이름 | 斉藤和巳 / KAZUMI SAITOH |
채널 URL | https://www.youtube.com/channel/UCPZTIne5_lbA02WroeXhJtQ |
활동 시작 | 2020년 4월 5일 |
장르 | 야구 |
구독자 수 | 4.78만 명 (2022년 7월 30일 기준) |
조회수 | 626만 회 (2022년 7월 30일 기준) |
네트워크 | PAMS |
2. 프로 입단 전
1977년 교토부 교토시에서 태어나, 형의 영향으로[26] 초등학교 1학년 때 쇼호 파이터즈에 입단하여 4학년 때부터 포수로 경기에 출전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보이즈 리그의 교토 스타즈에 입단했고, 강견 포수로 활약하며 3학년 때부터 투수로도 주목받았다.[25]
남 교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를 맡았다. 3학년 여름에는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서 고시엔 출전을 목표로 했지만, 부 대회 베스트 8에 그쳤다.[26] 고시엔 출전 경험이 없는 무명 고등학교 선수였지만, 하세가와 마사유키, 호시노 토모키와 함께 고교 투수 빅 3으로 주목받았다.[26] 190cm가 넘는 큰 키와 잠재력을 인정받아 1995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부터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2. 1. 유년 시절
1977년 교토부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형의 영향으로[26] 초등학교 1학년 때 쇼호 파이터즈에 입단하여 4학년 때부터 포수로 경기에 출전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보이즈 리그의 교토 스타즈에 입단했고, 강견 포수로 활약하며 3학년 때부터 투수로도 주목받았다.[25]남 교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를 맡았다. 3학년 여름에는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서 고시엔 출전을 목표로 했지만, 부 대회 베스트 8에 그쳤다.[26] 고시엔 출전 경험이 없는 무명 고등학교 선수였지만, 마찬가지로 고시엔 출전 경험이 없는 하세가와 마사유키, 호시노 토모키와 함께 고교 투수 빅 3으로 주목받았다.[26] 고교생 시절부터 190cm가 넘는 큰 키와 잠재력을 인정받아 1995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부터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2. 2. 고등학교 시절
사이토는 미나미쿄토 고등학교(현재의 교토코갓칸 고등학교) 시절부터 NPB 스카우트들로부터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그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투수 하세가와 마사유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수 호시노 토모키와 함께 이 시대의 "빅 3"로 불렸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1995년 NPB 드래프트에서 사이토를 1라운드 지명으로 선발했다.3. 프로 선수 경력
1995년 NPB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현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사이토를 1라운드 지명으로 선발했다. 사이토 가즈미는 남교토 고등학교 시절부터 NPB 스카우트들에게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투수 하세가와 마사유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수 호시노 토모키와 함께 "빅 3"로 불렸다.
프로 선수 경력 동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소속되었으며,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등록명은 "'''가즈미'''"였다.
투수로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3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개인적으로는 NPB에서 총 12개(8개 타이틀, 4개 주요 표창)를 수상했다.[19] 200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7번째이자 21세기 최초, 헤이세이 시대 유일의 투수 5관왕을 달성했다.[20] 퍼시픽 리그 사상 최초로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2회 수상했으며,[21][52] 최우수 투수상은 3회 수상했다.
잦은 부상, 특히 만성적인 어깨 관절 불안정으로 고통받아 1998년 시즌 전체를 재활로 결장하기도 했다.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 손상으로 인해 2007년을 마지막으로 1군 등판이 없었고, 2011년부터는 지배하 선수 등록에서 제외되어 같은 구단의 재활 담당 코치를 맡으면서 현역 복귀를 목표로 했지만, 2013년 7월에 복귀를 포기하고 같은 달 31일 자로 퇴단했다.[22][23][24]
3. 1. 다이에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2011년 지배하 선수 등록에서 해제되어, 1월 1일 "3군 재활 담당 코치"로 코치 계약을 맺었다[55]。일본야구기구 등록상 자유 계약 선수였지만,[56] 현역 복귀를 목표로 재활을 계속했고, 구단도 복귀가 가능해지면 선수 계약을 다시 체결할 방침이었다. 등번호는 "66"번을 유지했다. 12월 1일 스잔느와 재혼했다[57]。2012년 타격 투수를 맡는 등 순조롭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013년 7월 29일 기자 회견을 통해 "1군 전력이 될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며 현역 복귀를 포기하고 7월 31일 구단을 퇴단한다고 발표했다[58][24]。9월 28일 야후오크돔에서 은퇴식이 열렸고, 시구에서는 최우수 배터리 상을 함께 수상한 조지마 겐지에게 투구했다[23]。
3. 1. 1. 1996년 ~ 2002년: 초기 선수 생활
사이토 가즈미는 1997년 프로 2년 차에 처음으로 1군(일본의 "메이저 리그"에 해당) 무대에 데뷔했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성장이 종종 저해되었다. 특히 만성적인 어깨 관절 불안정으로 고통받았는데, 이는 투수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코치들은 심지어 포지션을 변경하여 타자가 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2군("마이너 리그" 또는 "팜 팀") 경기에서 대타로 투입되어 다음 이닝에 좌익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이토는 이를 거부하고 투수로 남을 것을 고집했다.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1998년 시즌 전체를 재활로 보낸 후, 2000년에 마침내 1군에서 첫 승리를 기록했다. 그는 그 시즌에 5승을 거두었는데, 그중 4승은 페넌트레이스 막바지인 올스타 휴식기 이후에 거둔 것이었다. 하지만, 호크스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일본 시리즈 선발 투수로 나서지는 못했다.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사이토에 대한 기대는 상당히 높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호크스의 미래 선발 에이스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불행히도 그는 어깨에 정체 불명의 통증에 시달리며 시즌 거의 전부를 결장했고, 단 한 번의 승리도 기록하지 못했다. 2002년 8월 10일,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와의 경기에서 2년 만에 정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시즌을 4승 1패 기록과 2.94 ERA로 마쳤다.
3. 1. 2. 2003년: 에이스로 발돋움
오 사다하루 감독은 2003년 시즌 전 사이토 가즈미에게 "우리 에이스는 올해 사이토 아니면 테라하라 하야토다"라고 말하며 큰 기대를 걸었다.[1] 사이토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생애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임명되었고, 3월 28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 등판했다.[1]그 해 사이토는 통산 9승밖에 거두지 못했던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개막 이후 16연승을 거두며 1985년 사토 요시노리 이후 퍼시픽 리그에서 처음으로 20승 투수가 되었다.[1] 시즌 최종 성적은 20승 3패로, 승률(.870)과 평균자책점(2.83) 부문에서 리그 공동 1위를 차지했다.[2] 특히 평균자책점은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같은 이닝, 같은 자책점을 기록하여 공동 1위가 되었다.[2]
같은 해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 이가와 게이 역시 20승을 달성하면서, 1982년 이후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에서 모두 20승 투수가 나오는 진기록이 세워졌다. 두 선수 모두 사와무라 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는데, 사와무라 상이 같은 해에 두 명의 투수(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에서 각각 한 명씩)에게 수여된 것은 처음이었다.[3]
사이토 가즈미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이끌고 일본 시리즈에서 이가와 게이의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1999년 이후 첫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두 선수는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3. 1. 3. 2004년: 부진과 재기
사이토는 2004년 시즌에 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임명되었지만, 제 기량을 찾지 못하고 4월 중순에 2군으로 강등될 정도로 부진했다.[4] 다시 복귀하여 10승 7패를 기록했지만, 시즌 방어율 6.26[4]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팀이 치른 경기 수만큼 이닝을 던진 투수 중 최악의 단일 시즌 방어율이었다. 또한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라이온스에게 무너졌다.3. 1. 4. 2005년: 연승 행진과 플레이오프 좌절
,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되었으나, 사이토는 어깨 통증이 재발하여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와다 쓰요시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5] 4월 27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상대로 시즌 첫 선발 등판을 가졌고, 9월 7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까지 15연승을 기록했다. 사이토는 1981년 시바쿠니 마시바 이후 처음으로 15연승을 달성한 투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NPB 역사상 14경기 이상 연승을 여러 번 기록한 최초의 투수가 되었다(2003년에 처음 이 기록을 달성했다). 16승 1패, 승률 .941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6]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하며 호크스가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3. 1. 5. 2006년: 투수 5관왕 달성
사이토 가즈미는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할 일본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대신 NPB가 투구 동작과 관련하여 채택하기로 결정한 새로운 규칙에 맞춰 자신의 투구 메커니즘을 조정하는 데 집중했다. 3월 26일 마린스를 상대로 시즌 첫 승을 거두었고, 개막전 선발 등판은 세 번째였다.6월 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교류전에서 1안타 완봉승 경기를 펼쳤는데, 유일한 안타는 와키야 료타의 내야 안타였다. 게다가 와키야가 1루에서 리드오프하고 있는 동안 견제구로 아웃시켰고, 최소 타자 27명만을 상대하며 승리했는데, 이는 "준 퍼펙트 게임"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8월에 두 번의 완봉승을 거두며 5승 무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18승 5패, 205 탈삼진, 1.75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쳤으며,[7] 트리플 크라운 세 가지 부문(승리, 탈삼진, 평균자책점)은 물론 승률과 완봉승에서도 리그 1위를 차지했다(1981년 에가와 스구루 이후 5개 부문에서 모두 리그 1위를 차지한 최초의 투수). 만장일치로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으며(두 번째),[8] 최우수 선수상은 당시 파이터스의 1루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돌아갔지만, 사이토가 실제로 1위 표를 더 많이 받았다. 또한 두 번째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
10월 7일 라이온스와의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과 10월 12일 파이터스와의 2차전에 등판하여 6년 만에 처음으로 4일 휴식 후 등판했다. 16⅓이닝 동안 단 2실점만을 허용했지만, 호크스는 두 경기 모두 1-0으로 졌고, 전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9] 후자는 파이터스의 좌투수 야기 토모야에 의해 졌다. 파이터스가 후자의 경기 9회에서 그를 상대로 결승 득점을 올린 후, 좌절감을 참지 못하고 땅에 쓰러져 눈물을 흘렸고, 동료 훌리오 줄레타와 졸버트 카브레라가 그를 마운드에서 일으켜 세웠다.[10]
3. 1. 6. 2007년: 부상과 마지막 등판
사이토 가즈미는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개막전(3월 24일)에서 호크스의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2년 연속이자 통산 4번째 개막전 선발 등판이었으나, 경기를 패전 없이 마쳤고 시즌 초반 몇 주 동안 고전했다. 4월 26일, 근력 약화로 재활을 위해 2군으로 내려갔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7월 10일)에 복귀했으며,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첫 경기에서 마린스를 상대로 시즌 첫 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팀은 사이토가 한 번 등판에 100개 이상의 투구를 하지 않고, 등판 간 10일의 휴식을 취하는 특별한 일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즌 동안 12번 선발 등판하여 72⅓이닝 동안 6승 3패, 평균자책점 2.74를 기록했다.10월 8일, 클라이맥스 시리즈(이전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마린스를 상대로 등판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첫 승을 거두기 위한 10번째 시도(일본 시리즈 제외)였지만, 마린스 타선을 막지 못했고, 호크스는 다시 1차전에서 패했다. 이 경기가 사이토의 프로 선수로서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3. 1. 7. 2008년 ~ 2013년: 부상과 은퇴
사이토 가즈미는 2008년 시즌을 앞두고 오른쪽 어깨에 관절경적 회전근개 수술을 받았다.[11] 수술 후 재활을 위해 시즌 전체를 쉬어야 했다. 9월에 일본으로 돌아와 다음 시즌 개막전에 투구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009년 1월, 정규 시즌 복귀를 목표로 애리조나에서 재활 훈련을 했지만, 어깨 회복이 더뎌 ''니군'' 팀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결국 2009년에는 투구하지 못했고, 선수 경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0년 1월 31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사이토가 오른쪽 회전근에 세 번째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다.[12] 3년 연속 투구하지 못했지만, 10월 4일에 캐치볼을 재개했다. 2011 시즌 복귀를 희망했지만, 4년 연속 투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컨디셔닝 코치 계약 제안을 받고 수락했다.
2011년 1월 1일, "3군 재활 담당 코치"로 코치 계약을 맺었다.[55] 일본 야구 기구 등록상으로는 자유 계약 선수였지만,[56] 현역 복귀를 목표로 재활을 계속했고, 구단도 복귀가 가능해지면 선수 계약을 다시 체결할 방침이었다. 등번호도 "66"번을 유지했다. 12월 1일에는 스잔느와 재혼을 발표했다.[57]
2012년에는 타격 투수를 맡는 등 순조로운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2013년 7월 29일, "1군 전력이 될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며 현역 복귀를 포기하고 7월 31일자로 구단을 퇴단했다.[58][24] 9월 28일, 야후오크돔에서 은퇴식이 열렸고, 최우수 배터리 상을 함께 수상했던 조지마 겐지에게 시구를 했다.[23]
4. 지도자 및 해설가 경력
은퇴 후 사이토 가즈미는 지도자와 해설가로 활동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3군 재활 담당 코치를 맡아 선수들의 재활을 도왔다.[22][23][24]
2014년부터는 TVQ 규슈 방송 야구 해설자, 니시닛폰 스포츠 전속 평론가로 활동하며 TV 도쿄(BS 테레토)의 야구 해설도 담당했다. 2023년부터는 소프트뱅크 1군 투수 코치를 맡고 있으며, PAMS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22][23][24]
4. 1. 은퇴 후 활동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은퇴 후 활동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5. 선수 특징
사이토 가즈미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활약하며 3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파워 투수이다. NPB 통산 12개 타이틀(다승왕 2회, 최우수 평균자책점 2회, 최다 탈삼진 1회, 최고 승률 3회) 및 주요 표창( 사와무라 에이지상 2회, 베스트 나인 2회)을 수상했다.[19] 특히 200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7번째이자 21세기 최초, 헤이세이 시대 유일의 투수 5관왕을 달성했고,[20] 퍼시픽 리그 최초로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2회 수상했다.[21][52]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등록명은 "'''카즈미'''"였다.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 손상으로 2007년 이후 1군 등판 기록이 없으며, 2013년 은퇴했다.[22][23][24]
5. 1. 투구 스타일
사이토는 신장 192cm, 체중 97kg의 우투수 파워 투수이다. 키가 큰 투수에게는 다소 특이하게, 하체를 최대한 활용하는 드롭 앤 드라이브 동작으로 오버핸드 투구 폼을 가지고 있다.사이토의 레퍼토리는 전성기 시절 152km/h에 육박하는 142km/h에서 148km/h의 포심 패스트볼을 비롯하여 평균 이상의 스플리터, 가끔 던지는 커브와 슬라이더를 포함했다.[15] 146km/h까지 속도를 낼 수 있는 12-to-6 형태의 날카로운 브레이크를 가진 스플리터를 결정구로 자주 사용했다.
6. 개인사
사이토는 탤런트이자 가수인 스잔느와 2011년 12월에 결혼하여 2014년 1월에 아들을 얻었다.[16] 그러나 2015년 3월 17일, 스잔느와 사이토는 각자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바쁜 업무 스케줄을 이유로 이혼을 발표했다.[17][18] 두 사람은 아들을 공동으로 양육하고 친구로서 서로를 계속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